분류 문학 [성호사설 6] 광주리의 추억 작성자 정보 작성자 KREW 작성일 2026.04.07 11:09 컨텐츠 정보 조회 66 목록 본문 이원배 (늘푸른 장년회 회장, 시인/수필가) 사람이 태어나서 가지는 첫 기억은 몇 살 때 부터 일까?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학계의 통설은 만 3~4세경이라고 한다. 만 3세 이전에는 기억을 장기적으로 저장하고 회상하는 뇌 영역(특히 해마)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을 하기 이전의 기억은 주로 감각적, 비 언어적인 형태로 저장되는데, 언어적 사고에 익숙한 성인이 이러한 비언어적 기억을 '언어'로 표현하거나 '논리적 흐름'으로 회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유아 시절의 기억은 기억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그 기억을 '꺼내지 못하는' 인출 실패 때문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내 기억은 유치원 가기 전 경주에서 비롯된다. 아마 네 살 쯤 이었을 것이다. 내가 살던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고, 가을이면 어머니가 감을 따 주시던 기억이 난다. 1954년의 기억이다. 확실 치 않지만 집 근처 유치원에 다녔고, 1956년 2월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입학식 하던 생각이 난다. 왼쪽 가슴에는 이름표를, 그 아래는 흰 손수건을 부착했던 기억이 난다. 이름표를 부착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흰 손수건은 왜 달고 있었던지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았다. “손수건을 가슴에 달았던 가장 실용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바로 '콧물'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난방이 잘 되지 않아 3월의 입학식 날은 꽃샘추위가 매서웠습니다. 위생 관념이나 환경이 지금 같지 않아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일명 '코흘리개')이 많았고, 콧물을 닦느라 옷소매나 옷깃이 지저분해 지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의 왼쪽이나 오른쪽 가슴에 흰색 면 손수건을 핀 등으로 고정시켜 달아주었습니다. 이는 아이가 급할 때 쉽게 콧물을 닦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필수 휴대품'이었습니다.” 그랬다. 남부지역이라도 경주의 겨울은 추웠다. 농협 간부인 아버지 덕택에 우리 집은 겨울난방을 위한 마른 장작더미를 잔뜩 창고에 재어 두고 살았지만, 전쟁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이어서인지 땔감마련조차 힘든 가난한 살림때문에 추운 방에서 지내던 동네 꼬마친구들은 맨날 코를 훌쩍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유독 심한 아이 중에 하나가 ‘광주리’였다. 경주에서 초기 유년시절을 살았지만 기억에 남는 친구는 그 밖에 없다. 하도 오래 되어서 당연히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밤중에 이부자리에 자주 오줌을 지리는 바람에 광주리(대나무가지로 만든 그릇)를 뒤집어쓰고 동네마다 소금 얻어 다니던 바람에 붙여진 별명만은 고령이 된 지금에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와 놀던 기억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그와 나는 틈만 나면 집에서 담요 한 장씩 가지고 나와서 큰 언덕위에 올라가서 신나게 잔디 미끄럼을 타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라 왕릉이 있는 대릉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접근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 첨성대 안으로 기어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 보던 기억, 그 안에 거지떼들이 먼저 들어가 자리 잡으면서 우리를 올라오지 못하게 소리지르던 기억, 오줌발이 누가 멀리 가나 서로 오줌 누기 기억, 경주역 왕래하는 철로변에서 철길에 귀를 대고 있다가 기차가 가까이 오면 후다닥 튀어 도망가던 기억, 그런 위험천만한 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붙잡으려 달려오는 역무원을 피해 혼비백산 도망가던 기억들. 참 이상도 하다. 요즘은 차 문을 잠그고도 깜빡 잊고 되돌아가 잠금을 확인하거나, 달력에 메모까지 하고도 지인과 만날 약속을 까맣고 있다가 뒤늦게 전화를 받고 허둥대며 나가거나, 몇 십분 전에 배운 영어단어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이불 속으로 들어간 휴대전화를 찾아 이방 저방, 이곳 저곳 뒤져보기 다반사인데 광주리의 이름은 왜 해가 가고 달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국민학교 2학년 초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대구로 이사 갈 때 탄 이삿짐 트럭 뒤에서 나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광주리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며 자동차여행에 신이 나있었는데, 광주리는 연신 코를 훌쩍이며 싱굼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다가 트럭이 떠나자 갑자기 뛰면서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힘에 부치자 포기한 듯 털썩 주저앉아서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야에서 함께 사라질때까지. 그제야 내 어린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인생 후반부에 들어서니 불현듯 옛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울 형님에게 우리가 살던 경주의 그 동네가 어디였는지 물어보니 구글지도로 자세히 표기해 준다. 아무래도 다섯 살 많은 형님은 경주에 대한 더 많은 기억을 간직해 왔던 듯하다. 그래서 한국 가면 내 살던 그 동네를 한 번 가 보고 싶다. 감나무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5층건물이 들어섰고, 주변도 많이 변한 듯하다. 가 봐야 광주리는 물론 그 시절의 인연은 형체도 없을 듯한데 왜 한 번 찾고 싶은 지. 아마도 자아를 인식한 첫 장소이고, 생애 첫 친구였던 광주리에 대한 추억 때문이 아닐지. 지금 살아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사는 지 아무런 기억도 없지만 왠지 그곳에 가면 광주리가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꼭 잡아 줄 것 같다. 그리고 대릉원에 가서 잔디 미끄럼을 타거나 철로변에서 장난치고 놀자고 할 것만 같다. 세월은 무심하게 오래도 흘렀건만 내 상념은 아직도 생생하게 그 시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끝) Image: AI Generated SNS 공유 관련자료 댓글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